[ZERO Speech] 고인돌의 재해석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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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고인돌의 재해석①
  • 권영국 베스트라인기공소 대표
  • 승인 2023.07.0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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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우리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7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로 추정하고 있고 이후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며 농경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물과 경제개념이 생기면서 고대사회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후 문자가 들어오면서 역사시대가 시작되게 되었다.
문자도 없던 그 시대 고대인들의 삶은 지금도 많은 부분의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지만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대인들은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겼다. 특히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너무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그게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이라는 뜻은 작은 돌을 이용해 큰 돌을 고였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며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현재 남한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3만여 기가 넘고 북한에서는 1만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 가까운 개수이니 우리나라는 가히 ‘고인돌의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이 가운데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보존 상태와 밀집도, 그리고 형식의 다양성 면에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특히 고창의 죽림리를 중심으로 442기의 고인돌이 몰려 있으며 이 동네에는 고인돌이 너무 흔해 집 마당 한가운데 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집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는 집도 있다.
도대체 이 한반도에는 왜 그렇게 많은 고인돌이 몰려 있는걸까? 또한 고인돌은 망자의 무덤 용도로만 사용되어진 걸까? 이번호에서는 고인돌의 그 디테일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한다.
고인돌은 지금부터 약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만들어진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탄소연대 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8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5천년전의 유물을 접할 수 있다는것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듯이 그 종류는 크게 북방형인 탁자식 고인돌과 남방형인 바둑판식 고인돌. 그리고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 고인돌로 구분하고 있으며 그 크기도 다양해 덮개의 무게는 보통은 10톤 미만이지만 큰 것은 100톤 이상 되는 것도 수십 기이고 화순의 핑매바위라 불리우는 고인돌은 무게가 무려 280톤에 이른다. 이는 소형자동차 280대에 상응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 역시 한반도에 있는데 김해시의 구산동 고인돌은 무게가 자그마치 350톤에 달하며 그 발굴 과정에서 크게 손상이 되어 학계에서는 인정받지는 못한다고 한다.
중장비도 없던 그 시절에 채석장에서 그 거대한 돌을 채석해 수 킬로미터를 옮기고 이어 주춧돌 위에 올리는 엄청난 토목공사는 지금도 상상을 할수  없다. 아마도 큰 돌은 적잖은 기간 수백. 수천 명이 동원되지 않고는 옮길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숨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지금도 전남 화순에는 그 채석장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말로는 고인돌은 족장의 무덤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이는 한반도가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던 것으로 규명하고 있는데 그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해석을 조금 달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고인돌의 다른 기능들을 고증된 근거를 통해 다음 호에서 다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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