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은 그야말로 재건은 엄두도 못 낼 만큼 초토화되었다.
그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지만 왜란이 끝난지 10년도 되지 않은 1607년 일본은 조선에 화해를 청하는 서신을 하나 보내온다.
조선에 사절단을 청하는 내용이었는데, 우리 생각엔 일본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우리 조상님들은 이를 수락하고 사절단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게 참 아이러니다.
그 속에는 얼굴도 두꺼웠지만 조선에 사절단을 제안한 일본의 교활한 의도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막부가 새롭게 등극하면서 국제관계를 회복해야 했고, 자국민들에게 조선의 사절단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람들이라고 속여 자신들의 공적을 과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꼼수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과의 화해가 달갑진 않았지만 전쟁 이후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다시는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회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을 송환하려는 의도도 있었기에 사절단을 보내게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 보낸 이 사절단을 통신사라고 불렀는데 조선 초기부터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왜란 이후에 파견된 사절단을 통신사라고 한다.
아무튼 양국의 정치적 의도가 맞아 떨어지면서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년동안 총 12차례나 일본을 방문했으며 통신사의 규모는 약 500명 정도의 큰 이벤트였다.
국서를 받들고 가는 총책임자인 정사와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 사행의 경과를 기록하는 종사관, 이들의 경호를 담당하는 군관과 시문창화를 담당하는 제술관, 사자관, 서기와 통역관과 음악과 행렬을 이끄는 기수와 악공, 그리고 일본에서 요청한 의원, 화원, 마상재 등 정치 문화적으로 다양한 재원들이 참여하여 통신사를 꾸몄다.
해외 나들이도 하고 견문도 넓히기 위해 통신사에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긴 시간 여행중에 병에 걸리거나 배가 침몰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왜놈의 나라에 발도 들이기 싫다며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예산은 약 100만냥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7.000억 정도의 엄청난 비용이었는데, 이 비용은 전부 초정한 일본 측에서 부담했다.
하지만 조선도 그냥 빈손으로 갔던 건 아니고 호랑이가죽, 말, 인삼, 꿀, 비단, 모시, 붓 등 상당한 규모의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
특히 중국인들도 그랬지만 일본인들도 조선의 인삼은 최고의 상품으로 알아주었다.
이렇게 사람을 선별하고 선물을 준비하며 통신사를 꾸리는 데만 무려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통신사 중에는 자제군관이라고 해서 삼사의 친인척 중 전도유망한 선비를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즉 고위관료의 빽으로 선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통신사에 선발된 관원들은 임금께 인사를 한 후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한양에서 일본까지는 약 5천리.
대마도를 거쳐 에도까지는 8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 험한 일정이었다.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하면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기풍제를 지내고 배에 오르게 된다.
그들의 험난한 여정과 경악할 일본문화는 다음편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 기사는 제로(Zero)가 취재·작성한 저작물입니다. 출처를 표기하더라도 사전 동의 없이 기사 전체 또는 일부를 캡처·요약·재구성하여 인스타그램, 유튜브, 블로그, 카카오톡 채널 등에 게시하는 행위는 저작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제로(Zero)는 무단 도용 사례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적발 시 게시물 삭제 요청과 함께 법적 조치를 취합니다.
▶ 전재·인용 문의: zero@dentalzero.com (정식 제휴 시 콘텐츠 이용 가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