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꾼 실학자 정약용
전편의 김시습, 이이에 이어 조선 3대 천재 중 마지막으로 정약용 선생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정약용 선생은 실학자 중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하셨고, 그의 주옥같은 명언들은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정약용이 태어난 경기도 남양주의 마제마을에 가면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을 볼 수 있다. 그 생가 뒤에는 정약용과 그의 부인을 합장한 묘도 보존되어 있으며 정약용 기념관, 실학박물관, 다산 생태공원 그리고 경기도 최대 규모인 다산 도서관도 건립되어 있을 만큼 다산은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2012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화인물 네 사람을 선정했는데, 동양인 최초로 그 이름을 올리며 세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분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묘하게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게 되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1762년에 출생했다. 그의 천재적 기질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들어내는데, 7살때 지었다는 산이라는 시를 보고 아버지 정재원은 그의 놀라운 관찰력에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은 현감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22살에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며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영재그룹인 성균관에서도 매번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의 특출함을 알아봤던 정조의 눈에 들면서 정조와의 조우가 시작되게 된다. 그럼에도 본시험인 대과에 번번히 낙방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이 대립하고 있던 남인 출신인 정약용을 합격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약용은 28살에 대과에 급제하게 되는데, 당시 과거시험의 주관자가 남인 출신의 거두 최제공이었으니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관직에 진출한 정약용에게 공부를 많이 한 정조도 학문적으로 이기지 못해 당황했다는 기록들은 실록에서도 등장한다.
정약용은 어떤 계기로 정조의 절대신임을 얻게 되는데, 정조가 수원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에 능행을 가야 했는데 이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성대하게 치룰 계획을 하면서 2천 명이 넘는 행렬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기가 어려움이 있어 정약용에게 강을 건널 배다리를 만들라고 명하였다.
정약용은 36척의 조운선을 이용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하여 만듦으로써 2천여 명의 행렬이 순식간에 강을 건너니 정조는 그의 능력에 감탄을 하였고, 정약용에게 정조가 꿈꾸었던 신도시 화성의 설계 및 총책임을 맡기게 된다.
정약용은 지금의 크레인과 같은 거중기를 개발하고 또한 녹로와 유형거라는 청단수레를 만들어 10년 계획이었던 화성건설을 단 2년 9개월 만에 완공시키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으니 성리학자를 넘어 과학자이자 건축학자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로 찬사를 받게 된다.
정조는 전폭 신뢰하던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기도 했는데, 그는 목민관들의 횡포에 억눌려사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으며 여러 명의 목민관의 비리를 적발해 왕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그들 중 서용보와 연관된 것이 빌미가 되어 보복당하며 그의 정치생명에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정조와 함께 새로운 조선을 이루려는 정약용의 꿈은 정조의 사망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의 굴레속에서 서서히 침몰해 갔다. 정약용을 디스하던 기득권 반대파의 끝없는 모함으로 그는 더 버티기 힘들었고 결국 사직상소를 올리고 고향인 마제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 지었는데 이는 정약용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정조 사후, 정약용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온다. 정약용은 서양의 뛰어난 문물이 전해지는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서학은 천주교를 등에 업고 조선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며 그의 집악은 풍비박산이 났고, 정약용과 그의 형인 정약전은 직접적인 관련이 적다고 하여 정약용은 포항을 거쳐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도 정약용은 18명의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고,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엄청난 저서들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을 비롯해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의학서인 마과회통을 저술하였으며, 지금의 사회주의와 유사한 여전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정약용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서학자이며, 의사이자 건축공학자로, 법학자이자 문학자인 각 분야의 전문가였으니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영향력 있는 4대 인물로 선정되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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