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인간 공물, 공녀의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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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인간 공물, 공녀의 잔혹사
  •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대표
  • 승인 2023.05.0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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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모나 일가친척은 서로 모여 통곡하며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국문에서 송별하는데 이르러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었고 스스로 목메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 걱정에 기절하는 자도 있으며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자료는 고려 말 원나라에 상납했던 공녀의 착취 현장을 이곡이라는 인물이 사실적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공녀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바쳐지던 여성들을 일컫는 말로 대부분 약소국이 주변 강대국에 빌붙어 살아남기 위해 많은 조공과 더불어 노비로 쓰이기 위해 상납됐다.
남자들도 노비로 많이 끌려갔지만 취약한 여성들은 강대국의 노비나 궁녀로 끌려가 성 노리개 감으로 치욕을 당하였으니 힘이 약한 나라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공녀는 원의 간섭기인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조선 초에만 공녀를 12번이나 바쳤으며 우리에게 성군이라 알려져 있는 세종 때마저도 명나라에 조공과 공녀를 보냈다. 
조선 후기인 1636년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 시기에는 무려 50만 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갔고 이 중 여성은 20만 명에 달했다. 조선이 망하고 이어진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남녀를 포함한 조선의 포로들은 우선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기술자들은 나름 대우를 받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병사로 끌려가거나 노비의 삶을 살게 됐다. 
특히 인물이 좋은 여성은 첩이나 궁녀로, 그외의 여성은 노예시장을 거쳐 노비로 팔려 나갔다. 
가끔 사대부가의 자녀들은 비싼 값을 치루고 빼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 평민들은 감히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중국의 황제들은 한족보다 조선의 여인들을 선호했다. 그 중 일부는 중국의 대통을 잇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녀 출신의 궁녀들은 황제가 죽을 때 같이 생매장을 당하는 순장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백성들은 공녀 차출을 피하기 위해 어린 딸을 서둘러 혼인을 시키거나 숨기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고 이로 인해 조혼의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다.
공녀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가족을 공녀로 보내는 것도 당연히 모두가 기피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공녀를 생각할 때 하층민의 여인들만 공녀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대부의 여인들을 포함해 보내도록 요구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정해놓는 경우들이 있어 일반백성들 뿐만 아니라 양반가 여인들도 공녀로 차출 되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출세에 눈이 멀어 딸이나 여동생을 자발적으로 청나라의 고위층에 공녀로 바쳤던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후 전쟁의 후유증이 좀 잠잠해지자 조선은 포로 송환을 위해 최명길을 필두로 3만 여명의 조선인들을 겨우 조선으로 귀국 시켰고 이어서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귀국하며 청과 조선의 관계도 많이 개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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