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6.25전쟁 중 가장 위대한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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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6.25전쟁 중 가장 위대한 탈출
  •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대표
  • 승인 2023.04.0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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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1950년 터진 6.25전쟁 중 수세에 몰렸던 한국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포위돼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흥남철수작전. 10만 명에 달하는 아군을 후방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200여 척의 배가 동원됐는데 이는 군인들의 철수 작전이었고 피난민의 탈출은 아예 계획에도 없었다. 연합군이 후퇴 작전을 진행하자 흥남 부두에는 의외의 풍경이 벌어지는데 후퇴하는 군인들을 따라 수많은 피난민들이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이때 해병대 문관으로 통역을 맡았던 현봉학 선생은 막역한 친분이 있던 미국의 포니 대령과 함께 미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을 찾아가 애원했다.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저 피난민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 몰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아몬드 소장은 두 사람의 간절한 부탁에 결단을 내리고 마지막 배인 빅토리호의 선장인 라루 선장에게 피난민을 배에 태워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빅토리호의 선장인 라루 선장은 선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를 수락한다. 이는 상부의 명령이 아닌 현장에서의 결정이었다. 마지막 남은 화물선인 빅토리호에 싣고 있던 군수품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후 외항에서 부두로 진입한다. 배에 장착되어있는 크레인을 이용해 20명씩 나누어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도 했고 일부는 밧줄로 엮은 사다리를 이용해 배에 올랐다. 또 화물칸운 철판을 이용해 3층으로 개조한 뒤 5개의 화물칸에 층층이 사람들을 채우고 있어 갑판까지 빈 곳 없이 피난민을 가득 채웠다. 코앞까지 몰려온 중공군을 피해 목숨을 걸고 배에 올라탄 사람들. 이들을 태우기 위해 모든 방법이 동원됐으며 피난민들이 배에 승선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2월 24일. 마침내 원산에서 부산까지 정원의 200배가 넘는 1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운 배가 흥남 부두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필자가 당시 배에 타고 있었던 피난민의 증언을 전하자면 깜깜한 화물칸 안에서 사람들에 끼어 꼼짝을 할 수 없었고 배 멀미로 구토하는 사람, 대소변을 지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 오물로 인해 악취는 물론 바닥이 미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살았다는 안도감과 자유의 희망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위험한 탈출 속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고 심지어 놀랍게도 그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신만고 끝에 이들을 태운 빅토리호는 부산에 도착했지만 부산은 이미 피난민들로 가득해 입항이 거부됐다. 라루 선장은 80km를 더 항해해 25일 거제의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내려주었다.
‘한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현봉학 박사는 전쟁 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후학들을 가르치시다가 2007년에 별세 하셨다. 이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에 소개되며 우리에게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2016년에 그의 인도주의적 업적을 기념하여 남대문에 있는 세브란스 빌딩 광장에 현봉학 박사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함흥 철수 당시 빅토리호에서 출생한 아이 중 두 명이 세월이 흘러 머리가 히끗한 모습으로 제막식에 참여하여 66년 만에 흥남 철수의 감격을 되새겼다고 한다.
또 한명의 공로자인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이 일의 큰 감동을 준 사람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구해낸 그의 의로움은 큰 귀감이 됐으며 더불어 우리는 큰 빚을 진 것이다. 라루 선장은 한국 전쟁 후 수사가 되어 많은 봉사를 하시며 사시며 의인의 삶을 실천하셨다.  2001년도에 선종하셨고 가톨릭의 성인으로 추대되셨다. 
이 땅에 전쟁의 참혹함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이다. 그날의 생생한 역사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셨던 그 의인들을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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