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나라를 두개나 세운 여대왕 소서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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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나라를 두개나 세운 여대왕 소서노 ②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3.02.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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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 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사실 주몽이 20년 동안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나 토착세력인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피터지는 권력싸움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소서노는 두 아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보잘 것 없었지만 야망이 있던 한 젊은이를 한 나라의 왕으로 키워낸 경험과 노련함이 있었기에 소서노는 자신이 있었다.
삼국사기 온조 편에 의하면 형인 비류가 동생인 온조에게 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지금 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여기서 우리가 혹처럼 남아 있는 것은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가지 못하다”라는 기록을 전하고 있으며 이때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이들을 따랐다고 한다.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소서노와 그의 아들들은 마침내 한강 유역에 이르러 살만한 땅을 물색하게 된다. 큰아들인 비류는 바닷가를 선호해 소서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나누어 지금의 인천 지역인 미추홀에 자리 잡았고 작은 아들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거처를 정한다. 인천에는 지금도 미추홀구라는 지역 명칭이 있는데 2000여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함께 온 열 명의 신하들을 존중해 나라 이름을 ‘십제’라 이름 붙였다. 소서노는 장남인 비류를 따르지 않고 온조를 선택 하였으니 남쪽의 새 땅을 계획하고 주도한 것이 소서노였으며 위례성의 선택 역시 소서노의 판단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선택은 탁월했다. 미추홀은 바닷가라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백성들은 편히 살수가 없었던 반면 위례는 한강을 끼고 있어 땅이 비옥해 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했다.
비류가 죽고 나자 비류의 백성들은 미추홀을 떠나 대다수가 온조가 있는 위례성으로 오게 된다. 백성들이 많이 따르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개명하고 이를 기념해 동명왕 사당을 세웠다. 이때 등장하는 동명왕은 흔히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동명왕은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의 시조 이름이다. 이는 소서노와 온조가 세운 백제가 부여와 고구려의 정통성이 있음을 선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원전 6년에 파란만장했던 전설을 뒤로 하고 소서노는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들어 자연사 했다는 설도 있고 아들인 온조와의 이견으로 분란 가운데 사망했다는 설도 있는데 기록이 명확치 않아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소서노가 죽고 얼마 후 낙랑군이 백제를 침입해 위례성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당을 세우게 되는데 이 사당에 모신 인물이 바로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왕의 어머니를 넘어 나라를 지키는 인물로 존경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이렇게 진취적이고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소서노에 대해 많은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다소 평가절하 되어있는 느낌마저 든다. 삼국사기와 근대기록인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는 정도다. 이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는 현재 거의 전해져오고 있지 않으며 고려, 조선 시대의 역사서를 집필한 사람들이 대부분 유학자들이었으니 그들에게 소서노는 어떤 인물로 보였을까? 그들이 추구하는 유학에 빗대어 봤을 때 소서노는 일부종사, 현모양처의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 절개를 지키지 않고 재가한 과부였고 정실 부인이 아니었으며 남편의 뜻을 거역하고 집을 나간 여성이었다. 심지어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반역까지 자행한 인물로 당시의 여성상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던 인물로 보여질 수 있었다. 가부장적이고 편협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역사가들에게 이 위험한 여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에서 지워지게 됐을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역사의 큰 틀에서 이 소서노를 어떻게 평가하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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