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일본을 개혁시킨 조선의 포로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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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일본을 개혁시킨 조선의 포로들 ②
  • 권영국 소장
  • 승인 2022.12.0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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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의 많은 기술자들을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많은 서책들을 약탈해 갔다. 일본이 전국시대라는 오랜 내전으로 각종 기록과 서책이 소실됐기 때문에 이마저도 조선에서 훔쳐가 보충 하려했던 것이다. 궁궐과 양반집을 털어 약탈해간 책의 규모는 10만여 권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에서부터 유학, 불교, 문집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책뿐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선비들도 대거 납치해 갔는데 한 예로 형조좌랑을 지냈고 선비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강항은 몇 번의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탈출을 포기한 후 작전상 태도를 바꿔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나누는 처세를 펼쳤다. 그동안 강항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 등을 파헤쳤는데 이는 훗날을 기약하며 일본의 약점과 비밀을 파악하자는 의도였다. 강항의 뛰어난 글 솜씨에 일본사람들은 그의 글을 얻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하며 일본의 성리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강항과 후지와라는 함께 일본 최초의 유학 교과서인 사서오경 왜훈본을 완성하며 일본에서도 유학이 민간에게 개방되며 발전했던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훗날 강항은 고국으로 돌아와 2년 9개월 동안의 기록인 ‘간양록’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간양록은 일본의 역사와 풍속, 일본군의 군사전력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일본으로 가는 사신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하였다.
1624년 조선 통신사의 기록인 ‘동사록’에 따르면 “일본의 시장에는 물화가 산처럼 쌓여있고 살림집에는 곡식이 널려있으니 일본백성의 부유함과 풍성함이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전범국인 일본이 전쟁 이후 오히려 번영을 누린 반면 조선은 전쟁의 피폐함과 더불어 수많은 인력과 문화의 손실, 그리고 기술의 정체라는 후유증까지 격어야 했으니 이런 후일담은 우리에겐 실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자왜란이 종결된 후 7년째 되는 1605년 포로 송환 문제로 일본과의 협상이 시작 됐는데 그 문을 연 인물이 사명대사였다. 사명대사가 사절단을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여 납치된 조선인 수천 명을 데리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쇄환사절이 일본을 다녀가며 조선인들을 송환시켰는데 송환된 조선인은 8,482명으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송환된 조선인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는 어이없게도 냉담했다. 조경담의 난중잡록을 보면 “선장들은 피로인 남자와 여자들을 맡자 우리가 보는 앞에서 포박했다. 그 모습은 약탈보다도 심했다. 선장들은 그들을 모두 노비로 삼았다. 피로인이 미인이면 그 남편을 묶은 채 바다에 던져 그 여자를 첩으로 삼았다”라고 적혀있다. 포로들은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를 만났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같은 민족끼리 더한 고초를 당했다. 숱한 어려움을 당하고 조국을 다시 찾아왔는데 남자는 노비로 여자는 첩으로 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이 적군에 협력해 자발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자력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인정했지만 쇄환사절단을 따라온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이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들이 반성은 하지 못 할망정 안팎으로 고난을 당했던 우리 민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행태를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런 소문이 일본에 있는 포로들에게 전해지며 아예 귀국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메이지시대의 일본의 한 유학자는 임진왜란을 ‘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유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 유학의 비용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었다. 
나라가 약하다는 것과 전쟁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많은 손실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기술과 문화의 중요성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참담한 대가를 치룬 이후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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