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마이스터, 꿈이 아닌 실제가 되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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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마이스터, 꿈이 아닌 실제가 되다 ①
  • 김민경 기자
  • 승인 2021.12.28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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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기공계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있다

국내 많은 기공사들이 해외 진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에 대한 정보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ZERO는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치과기공사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독일 진출 8년 만에 독일 치과기공사 마이스터 시험에 합격해 ZTM(ZahnTechnikerMeister) 자격을 취득한 치과기공사 마이스터 이상효 기공사가 ZERO를 통해 독일행을 준비한 과정부터 실제 독일에서 기공사로 일하며 느낀 점, 마이스터 자격을 준비하고 취득한 과정을 함께 공유한다.

김민경 기자 zero@dentalzero.com

 

안녕하세요. 치과기공사 마이스터 이상효입니다. 우선 2022년 임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호랑이처럼 힘찬 한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지난 10월 제로지의 인터뷰를 통해 인사드렸었는데요, 이번 달부터 6개월 동안 지난 인터뷰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저의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기회가 저에게 주어져 이렇게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해본 적도 글로 써본 적도 없는지라 무엇을 써야할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야할지 아직 막막하지만 제가 어떻게 치과기공을 시작하게 되었고 마이스터라는 목표는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 그를 위해 어떠한 준비를 했었는지, 9년간 독일에서 생활을 하며 어떤 것들을 느끼고 경험했는지 또 마이스터가 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어떤 것들을 보고 배우며 느끼고 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며 여러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 

치기공학과 대학생, 마이스터를 꿈꾸고 
마이스터를 목표로 가지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나온 서울 토박이였다. 학창시절 제약회사 연구원이라는 꿈을 목표로 약대 진학에 도전에 재도전까지 했지만 원하는 곳에 진학하지 못했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선택한 치기공학과. 사실 주변에 치과기공사인 사람도, 치과기공사라는 직업에 대해 아는 것도 전혀 없었다. 내가 치기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포털 녹색 창에 검색해 본 결과 첫째, 졸업 후 나의 사업장을 차릴 수 있고 둘째, 나이가 들어서도 정년퇴직 걱정 없이 경제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생각에 입학한 나의 대학교가 위치한 곳은 당시 여행으로도 가본 적이 없었던 부산. 부산행 그 첫날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숙소로 가는 버스 안의 광경이 아직도 기억난다. 대화하는 것인지 싸우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말소리, 큰 시내버스를 마치 배달 오토바이처럼 운전하시는 버스 기사님, 또 그에 질세라 울려대는 경적 소리와 운전자들의 고함소리, 30분 남짓했던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당시 나에겐 나름 큰 문화충격이었나보다. 어찌 됐든 이렇게 시작된 낯선 곳에서의 생활. 먼 친척 가족 분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도 없어 혼자였지만 그렇다고 외롭거나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때 알게 된 나의 독립적인 성향이 추후 독일행을 결정함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추후 나는 이때 이 생각이 굉장히 오만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대학 신입생 생활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상도 친구들 사이에서 서울말을 쓴다는 이유로 초반엔 재수 없다며 욕을 먹기도 했지만, 특유의 적응력으로 주변 부산 친구들에게 서울말을 전파하며 금방 적응해나갔다. 이어지는 개강총회, MT, OT 등의 술자리로 1학년이 채워져 갔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면 어떤 이유에선지 잦은 술자리에도 함께 하는 친구들의 학점 경쟁이 치열했고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는 것이다. 시험 기간이면 2주 전부터 밤을 새워가며 도서관에서 공부 하고 실습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학교 실습실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실습과 공부를 하며 느꼈던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은 제법 잘하지만 그것을 손으로 표현하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석고카빙, 왁스조각이었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었겠지만, 주변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조각을 하기 위해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제출한 과제물은 오랜 작업 시간을 거쳐 봐줄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나 교수님은 나를 ‘잘하는 학생’으로 많이들 인식했지만 나 스스로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의 특성상 개인의 기술력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더욱 그 고민이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1학년을 보낸 후 나는 군에 입대했고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선 많은 대한민국의 병장들이 그렇듯 제대 후의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했다. 중고등학교 때 힘들게 배운 영어를 까먹지 않으려고 단어를 외우고 회화책을 읽었고 학교에 다니며 느꼈던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휴가 때 실습도구를 가져가 일과 외 남는 시간과 야간 당직근무 땐 책을 보고 연습을 하며 복학을 준비했다. 여기서 한가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고 받아들여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복학하고 다시 시작된 대학 생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인연들을 이때 만났다. 나와 함께 수업을 듣고 술도 마시며 함께 추억을 쌓았던 학우들,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과 강사님들, 현직에 계시며 조언을 해주신 선배님들 등 많은 인연이 있었고 그 인연들을 통해 마이스터란 목표를 가질 수 있었다. 또 그분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지금은 그 목표를 이뤄 마이스터가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인 최초 치과기공사 마이스터 취득자이신 이주헌 소장님의 특강을 통해 마이스터란 것을 알게 되었고 3학년 때 지도 교수님이셨던 이명곤 교수님의 제안으로 학우들과 유럽 직업탐방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독일 현지 이주헌 소장님의 기공소와 VITA社, 이탈리아의 Zirkonzahn 등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보고 생각한 것들이 내가 마이스터라는 ‘꿈’을 갖게 해준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이때에는 목표가 아닌 말 그대로 꿈이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나는 바로 유러피언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당시 첫 유럽 여행이라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게 보이긴 했지만 아직 해가 쨍쨍한 평일 오후 4시, 여유롭게 마인강변을 조깅하고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두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유럽에서의 삶을 꿈꾸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우리나라의 업무 환경도 많이 개선되어서 많은 기업과 회사들이 주52시간제,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고 심지어 주4일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당시 한국에선 주말 근무와 야근은 일반적이었다. 물론 기공계는 더욱 힘든 상황이었고. 이러한 현실에 살고 있던 내가 꿈과 같은 광경을 직접 보게 됐으니 내 가슴이 뛸 수밖에. 
이런 벅찬 가슴을 안고 처음 방문한 곳은 마이스터 이주헌 소장님의 기공소 덴탈스튜디오. 영화에서나 봤던 유럽식 건물과 앞마당, 밝고 깔끔한 내부와 친절한 직원들은 나의 가슴을 더욱더 뛰게 만들었다. (나중에 독일 생활을 하며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좋은 기공소는 독일에서도 흔치 않았다) 기공소 구경을 하고 우리는 이주헌 마이스터님의 일정을 따라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 갔다. 당시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 했기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 가셨고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느껴지는 뭔가 전문적이고 뭔가 멋있어 보이는 그 느낌! 그 느낌이 ‘아 나도 마이스터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한국인으로서 또 한국인 치과기공사로서 세계에서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독일에서 또 그곳의 대학병원 치과의사와 당당히 의견을 나누고 대화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었다. 
그 이후로 방문한 VITA사와 Zirkonzahn사에서는 마이스터로서 할 수 있는 다른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기공소 운영 외에도 큰 회사에서의 관리직, 프로그램 개발, 재료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마이스터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VITA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우리를 위하여 담당자 한 분께서 직접 우리에게 석고, 세라믹 파우더 등을 비롯한 각종 치과재료의 제작과정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셨는데 당시 치과재료 개발에도 관심이 있었던 나는 매우 흥미롭게 들었다. 

Zirkonzahn 본사는 이탈리아의 한 휴양도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말 주변 경관이 너무나도 멋진 곳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회사의 입구에 우리 방문 팀 4명의 이름과 태극기를 개시하여 환영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회사 내부는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있었고 일하시는 테크니커 분들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업무를 하고 계셨다. CAD/CAM 시스템과 머신을 만드는 회사라 그런지 젊고 활기찬 분위기도 기억에 남았다. 또 본사가 위치한 도시의 시내에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기공소가 있고 그곳에서도 마이스터가 근무하고 있어 다시금 마이스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직업적인 경험 외에도 많은 사회적, 문화적 경험을 하며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언젠가는 꼭 유럽에 돌아와서 일 해본다!’

유럽으로 직업체험을 가기 전인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방학 때마다 기공소로 실습을 나갔다. 학교는 부산이었지만 당시 가족은 경기도 동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명곤 교수님께 실습 가능한 기공소의 소개를 부탁했고 이때 수원의 한길기공소와 권수안 소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인연을 통해 나는 마이스터라는 ‘꿈’을 더이상 꿈이 아닌 ‘목표’로 만들 수 있었다. 전화를 통해 실습을 나가도 되는지 여쭙고 출근한 첫 날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소장님이 물으신 첫 물음. “야 너 술 잘마셔?” 그 장난 섞인 질문에 난 움찔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네!” 그렇게 실습 첫 날 소장님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술과 함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술 혹은 술자리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고 술자리에서의 편안하지만 진솔한 대화를 좋아한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사람과의 자리라는 전제하에. 첫 술자리를 생각해보면 소장님과 나의 관계는 사장과 직원도, 교수와 학생도 아닌 그저 처음 만난 선배와 후배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있었지만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 편했던 첫 술자리로 인해 그 후에도 소장님께 편하게 조언을 구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나는 방학마다 실습을 나갔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임상적인 것들을 경험했다. 유럽 직업탐방을 준비하고 있을땐 소장님의 도움으로 Zirkonzahn 한국 담장자분과 연락이 되어 이탈리아 본사의 초청으로 방문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대학교 졸업 후 나는 대부분의 졸업생이 그렇듯 실무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바보였다. 4년 동안의 대학 공부와 실습을 했음에도 바보라고 표현하는 것이 지금 공부를 하고 있거나 졸업을 하는 후배들에게 심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임상에서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거의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한국의 대학 교육 현실이 그렇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아는 기공소라고는 한길기공소 밖에 없었기 때문에 권수안 소장님께 기공소에 취직할 수 있는지 여쭤봤고 소장님께선 의외로 ‘그래. 갈 곳 없으면 와’라며 흔쾌히 받아주셨다. 사실 실습생 당시 소장님께 ‘똥손’ 소리를 듣기도 했었고 유럽을 다녀온 후엔 소장님께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도 말씀드렸었기 때문에 걱정도 했었다. 고용주 입장에서 나는 언제 나갈지 모르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장님께서는 오히려 나에게 “넌 어차피 해외로 갈 거니까 가기 전에 3~4년 동안 여기서 많이 배우고 나가서 한 번 도전해봐”라고 조언까지 해주셨다. 이때 비로소 나는 마이스터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고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예정보다 훨씬 빠른 불과 11개월 뒤 독일행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기공소를 떠나게 되었지만 실습생 시절과 그 후로도 많은 도움을 주신 권수안 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해 대학생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며 머릿속에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치과기공의 교육시스템이었습니다. 위에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졸업을 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하여도 실무적인 경험이나 업무 처리 능력이 매우 부족하여 취직 후 바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따라서 1년차 기공사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3~4년을 투자하여 공부했음에도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업무 능력 대비 높은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것, 기공소에서 근무하는 고년차 기공사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빠듯한 업무 시간을 할애해가며 하나하나 처음부터 가르치고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생긴다는 것 등 입장 차이에 의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의 치과기공계의 미래가 교육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이런 문제점들이 빠르게 개선이 되어야하고 보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교육시스템을 위해 치과기공사협회, 교육계 그리고 현재 필드에 계시는 치과기공사 선후배님들이 모두 함께 의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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