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Speech] 조선을 세우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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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Speech] 조선을 세우긴 했는데...
  • 권영국 소장(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
  • 승인 2021.10.10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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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후손들은 교훈을 얻는다. 현대인들의 지나온 삶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 치과기공사로서는 드물게 역사관련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영국 베스트라인치과기공소장(비전포럼 명예회장)의 색다른 역사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고려 말 요동정벌의 명령을 받고 진군하던 중 위화도 회군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역성혁명에 성공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들을 소탕하는데 일등공신이었으며 변방인 함흥에서 당시 수도인 개경에 진출하며 최영과 더불어 신흥 무인세력으로 급부상 했다.
이성계는 18세에 두 살 아래인 한 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방자 돌림의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혼인 후 20년이 넘도록 첩도 두지 않고 부인인 한 씨와 대단히 관계가 좋았으며 한 씨는 많은 자녀를 돌보면서 늘 전쟁터에 나가있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보필 하였다.
허나 이성계가 수도인 개경에 진출하면서 21살이나 어린 훗날 신덕왕후가 되는 강 씨를 새로 맞이하게 된다. 당시 그의 아들들과 비슷한 나이의 부인을 얻게 된 것이다. 훗날 신덕왕후가 되는 강 씨의 집안은 사실 대단한 권문세족 이었다. 권문세족이란 원의 간섭기에 원나라에 빌붙어 세도를 누리던 세력이었으니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고려 말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인해 친원 세력들은 풍비박산이 났고 강 씨의 가문 역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터라 앞날이 탄탄한 이성계와의 혼인으로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었다.
당시에 고려문화는 첩을 둘 수는 있었지만 현실은 첩을 둔 사람은 세인들의 심한 손가락질을 당했다.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 상속도 아들, 딸 상관없이 균등 하였으며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행봉사가 보편화 되었던 시기였다. 
조강지처인 한 씨는 그 이후 심한 속병에 시달렸으며 이성계가 왕이 되기 1년 전 사망하게 되는데 사인이 극심한 위장병이었다고 한다.
1392년 결국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며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데 인사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서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덕왕후 강 씨와 이성계 사이에서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9살 밖에 되지 않은 신덕왕후의 둘째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개국공신인 본처의 아들들은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당시의 총리격인 정도전도 방석을 지지하고 나서는데 이유는 신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힘없는 어린 왕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다섯째인 방원은 유독 탁월한 인물이었는데 아버지를 도와 조선건국에 힘쓴 일등공신이었으며 문무에 출중한 집안의 자랑이었다. 방원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면서 그의 형제들과 상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강 씨의 두 아들과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물론 이성계의 개국 파트너인 정도전까지 모조리 사사했다

신덕왕후를 너무나 사랑했던 이성계는 묘라도 가까이에 두고자 지금의 덕수궁 근처에 릉을 대규모로 조성하는데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그곳은 현재 ‘정릉’이 있던 곳이라 하여 ‘정동’이라고 불리고 있다. 훗날 방원이 조선 3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신덕왕후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컸던지 ‘도성 내에 계비의 무덤이 웬 말이냐!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멀리 옮기라’ 명하니 정릉은 지금의 국민대 근처에 다소 초라한 규모로 이장 됐다. 화려한 석물들은 일부는 땅에 묻어버리고 일부는 홍수로 소실된 청계천 다리 광통교 보수공사에 사용해 만인이 밟고 지나다니게 하라고 명한다. 지금도 광통교에 가면 그때 사용했던 석물들을 볼 수 있다. 결국 이성계는 큰 실의에 빠져 고향인 함흥에 내려가게 되는데 방원은 아버지를 모시고 오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분노가 극에 달한 이성계가 차사를 보내는 대로 죽이니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함흥차사’의 유래가 됐다.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은 새 왕을 세워야 했는데 본인이 나선다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당할 것을 알기에 장자 계승에 따라 일찍 세상을 떠난 첫째 형을 대신해 둘째 형인 방과를 왕으로 추대 한다. 정종은 눈치 보면서 2년간 집권하고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의 3대왕인 태종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이성계는 좋은 명분으로 조선을 건국 했지만 인사에 실패하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으니 효율적인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사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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