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an Sense] 슬기로운 기공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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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 Sense] 슬기로운 기공생활
  • 박혜원 심미치과보철기공학회 협력이사
  • 승인 2021.09.02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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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치과기공사 중 다수는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기공사라는 직업 자체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만큼 여성치과기공사들의 진출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타이트한 업무 강도와 출산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존재한다. Woman Sense는 여성치과기공사들의 솔직담백한 고백을 담은 지면으로 이번 호에는 박혜원 심미치과보철기공학회 협력이사의 원고를 게재한다.

 

“안녕하세요 4년차 병아리 치과기공사 박혜원입니다. 저에게 입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병아리 치과기공사 시절 면접 볼 때 자기소개한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참으로 당차고 겁이 없던 사회초년생이었다.

 

내 기공사 생활의 시작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교 선배님이 하시는 기공소로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9시에 출근했지만 퇴근은 무조건 12시를 넘겼고 당시 월급은 수습이라 80만 원이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수가 나오지 않아 석고작업을 하면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던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확하게 한 달 하고 보름을 근무했다. 나는 당연한 것들이 아닌데 당연시 되는 상황들에 반기를 들다가 퇴사를 결정하고 미련도 없이 그만두고 나왔다. 그때의 나는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것이 아니라 치과기공사라는 직업을 함께 버리고 나왔던 것 같다.

무엇이 그리 성급했던 걸까? 치과기공소를 그만둔 나는 바로 23살에 간호과에 입학했다. 상급종합병원에 취직을 목표로 두고 정말 열심히 공부해 1학년을 마무리 할 때 전체 석차 2등을 했다. 다시는 기공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간절함에 고 3때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는 겨울방학 기간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에 학비라도 보탬이 되고자 치과의원 기공실에서 일하게 됐는데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그곳에서 나의 기공인생이 다시 시작되었다. 법정 근로시간과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기공실 특성상 전반적인 파트를 배울 수 있어 성취감 또한 크게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기공실장님을 정말 잘 만났던 것 같다. 기공의 기초를 탄탄하게 쌓아주시고, 퇴근하면 회식으로 피로를 달래주셨던 고마웠던 실장님.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오랜 염원이었던 대학병원으로 이직을 하게 된다. 연고가 없는 지방이었고 원룸에서 생활하며 고되긴 했지만 늘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 대학원에 진학도 하게 되었고 재직 중에 조교 제의도 받았었지만 임상을 내려놓는 공백에 자신이 없어서 아쉽지만 포기했다. 많은 배움을 얻었고 좋은 분들과의 인맥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나의 재산이 됐다. 

 

그 후 국내 반도체 전문기업의 사내치과 기공실장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처음으로 맡은 책임 직책에 중압감을 느껴 입사 전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후배 기공사와 좋은 호흡을 맞추며 약 2년간의 재직생활을 순탄하게 마무리 했다. 지금도 그 후배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운 마음이 크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주말근무 없는 주5일제와 5시 정시 퇴근을 하며 ‘기공사도 이렇게 사람답게 직장생활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금 품었다.

30대가 시작되면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커져 부모님이 계신 원주로 이사를 했다. 기공실에 취직하고 싶었으나 결국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던 기공소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 기공소 생활은 많은 업무량에 지칠 때도 있었다. 또 해외보수교육연자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 등 공백시 업무처리와 대학원 병행 때문에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소장님께서 많이 배려를 해주셔서 무사히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고 그렇게 약 4년간의 기공소 생활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나는 평소 마음 속에 꿈꿔왔던 병원에 입사를 하게 된다. 현대그룹 소속의 상급종합병원이었던 그곳에서의 직장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쾌적한 근무환경과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의 전문성은 나에게 다시 열정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이라는 굳은 결심으로 도전한 지금 이곳, 병아리 시절 근무하던 대학병원의 분원에서 감사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즐거운 기공생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첫 직장에서 받았던 충격이 나에게는 쉴 수 없던 원동력의 계기가 되어준 것 같다. 지금은 기공소의 근로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내 주변만 해도 고충을 토로하는 기공사들이 많다. 특히 동기 중 연락이 닿는 친구들은 현재 상당수가 경력단절 상태이다. 물론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쉬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복귀를 하려고 할 때 과연 마음 편안히 그들이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직장은 있는가에 대하여 묻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한 동기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 기공소 소장을 학회활동을 하며 마주칠 때가 종종 있는데 얼굴을 마주 할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편하다. 

슬기로운 기공생활을 해왔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곳에서 나는 좋은 환경과 여건들을 구축해보려 한다. 그리고 슬기로운 기공사가 되어 오래오래 기공생활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훗날 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선임기공사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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