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r Interview] “돌아보니 ‘청출어람 청어람’이 가장 보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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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er Interview] “돌아보니 ‘청출어람 청어람’이 가장 보람 있었다”
  • 제로 편집팀
  • 승인 2021.02.2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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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민 YB 아트센터 연구소장

박치민 소장은 일본 치과기공을 공부한 1세대 치과기공사이자 스타 연자다. 30여 년 전 세라미스트로 성장하고 싶어 일본행을 선택, 7년간 와세다치과기공 트레이닝센터에서 교육과 인스트럭터 시절을 거쳐 한국 치과기공의 업그레이드에 기여할 수 있으리란 소박한 희망을 품고 국내로 복귀했다. 당시 포세린 바람이 불던 국내 치과기공계에서 박치민 소장은 선진 일본 테크닉의 정통주자로 큰 주목을 받았다. 박소장은 세미나와 기공소 운영을 거쳐 현재는 안양 YB 아트센터 연구소에서 치과기공사로 돌아가 후학들과 함께 치과기공의 기본을 다지는 또 다른 출발점에 서있다.  

ZERO 취재팀 zero@dentalzero.com


치과기공계 입문 후 어떤 변화의 시기를 경험하셨는지요? 
처음 치과기공사로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포세린 파트에서 캡 작업을 하면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크라운 완성을 향한 아쉬움이랄까요. 
30여 년 전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죠. 당시만 해도 내가 가고 싶은 파트가 있어도 지금처럼 비교적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그저 눈썰미로 지나가며 배우던 시절로 교육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치과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죠. 배움의 한계를 느껴 해외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일본 치과기공계를 알게 됐습니다. 1993년에 일본으로 가서 먼저 어학원에 등록하고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어요. 6~7개월 정도 걸려 JPT 1급을 따고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 다음해에 와세다치과기공 트레이닝센터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죠. 당시만 해도 외국인은 선발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배움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와세다치과기공 트레이닝센터 졸업 후 운 좋게도 센터에서 운영하는 기공소에 바로 취업해서 훌륭하신 선생님들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야마모토 마코토 선생님과 스승이신 미요시 선생님, 아오시마 선생님, 니시무라 선생님, 카타오카 선생님 등 그야말로 당시나 지금이나 레전드이신 분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소장님의 기공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큰 깨달음을 얻었던 적이 두 번 정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기공소에서 일할 때 와세다치과기공 트레이닝센터 미요시 유타카 소장님이 갑자기 누가 작업했냐?고 소리지르시는 데 보니 제가 제작한 하악 4본인가 6본 브릿지였어요. 보통은 하악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어렵습니다. 이때 한 30분간 서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평소 저를 귀여워해주신 분이지만 일할 때는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으시는데 이 날은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완전히 뜯어고쳐졌다고 할까요? 그때 눈이 떠진 느낌이었어요. 

두 번째는 90년대 초반 카타오카 선생님이 거의 하지 않는 개인 세미나를 하신다는 소식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엔을 내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카타오카 선생님 세미나는 처음 석고 조각부터 시작합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조각 작품을 칭찬하시기도 했는데 카타오카 선생님 세미나 후 주변에서 제 모델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게 됐죠. 

레전드 선생님들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우선 선생님들은 기본에 충실하셨어요. 모델 작업, 캡, 적합 작업까지 모든 과정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할 정도로 꼼꼼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카타오카 선생님은 형태학적으로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컨셉을 가지신 분입니다. 전치부나 구치부도 예술을 접목했다고 느꼈어요. 선생님은 치과기공사가 되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예술가가 됐을 겁니다. 치아를 보는 형태학적 측면이 차원이 다릅니다. 

곁에서 지켜본 선생님들의 특별한 부분은 먼저 기공료가 어마어마하게 고가라는 점이었어요. 예를 들면 당시 PFM의 일반 수가가 만엔이었다면 이 분들은 그 3~5배에 해당하는 가격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그 기공료 차이 이상으로 정말 정성을 들여 열심히 하셨어요. 우리가 보통 ‘열심히 한다’는 것의 거의 10배로 집중해서 제작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심지어 선생님들이 실패했다고 한 케이스도 제가 보기에는 우울할 정도로 너무 잘했죠. ‘모든 것이 다 퍼펙트다. 레벨이 다르구나’ 하는 부분을 절감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모델 작업도 직접 했는데 그분들의 모델을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샘플보다 더 예쁘고 깔끔했으니...물론 어마어마한 기공료가 결국은 그 답이라는 것도 깨달았죠.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은 어떤 분이신가요?
크게 세 분이죠. 학술 쪽으로 제가 큰 가르침을 받은 분은 야마모토 마코토 선생님과 와세다치과기공 트레이닝센터 시절의 제 스승님이셨던 미요시 유타카 선생님입니다. 경영 쪽으로는 니시무라 요시미 선생님을 꼽고 싶습니다. 

니시무라 선생님은 기술적으로 최고봉이지만 치과 그룹 내 활동을 오래 하시면서 고객과의 신뢰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신 분입니다. 고객들도 이 분이 아니면 안 된다 할 정도로 열심히 하셨고, 테크닉과 언변도 훌륭하시고, 특히, 동서양의 앞선 테크닉을 수용해 한 차원 높이신 분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니시무라 선생님의 테크닉은 눈물이 날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 집중력은 대단하시죠. 한번은 치과를 함께 방문했는데 그 유명한 혼다 선생님 치과에서 환자가 마음에 안 들어하자 보철물을 두말 않고 싸가지고 돌아가셔서 바로 재제작에 들어가시더군요. 치과기공사가 함께 꼭 참여할 수 있는 포괄적인 치과보철 진료를 제안하고 완성도면에서도 훌륭한 보철로 평가받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기공수가도 높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많은 고객층을 갖고 계셔서 기공소 운영을 탄탄하게 잘하신 분입니다.  

다양한 학술 활동을 활발히 해오셨는데 초창기와 지금의 기공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2000년에 국내로 복귀하게 된 계기는 제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배운 만큼 한국 기공을 업그레이드하는데 도움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기공소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마침 Shofu와 신흥과 인연이 되어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메탈크라운이 많았고 세미나는 많지 않았는데 마침 포세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여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포세린이 대중화되고 지르코니아가 도입되며 변화가 시작됐죠. 
지르코니아 도입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장에서 느낀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전됐어요. 진짜 혁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이제는 모든 기공소가 다 지르코니아로 제작하는 시대가 됐으니까요. 그러나 지금도 과도기라고 생각해요. 지르코니아 소재가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제작 시간과 소재의 투명감이죠. 투명하면서도 강도를 어느 정도까지 강하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죠. 지금도 강도는 충분하지만  제작시간이 문제입니다. 이맥스는 제작시간이 짧은 편이지만 지르코니아는 12-13시간 깎는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이를 단축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소재도 CAD/CAM을 하면서 세라믹, 지르코니아도 컬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각 작업간의 트러블이 없어야 하고 적재적소에 맞는 파우더 선택도 중요합니다. 

임영빈 소장과 함께
임영빈 소장과 함께

연자로 활동하시면서 아쉬웠던 점과 보람 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한동안 기공소를 경영하면서 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심미보철 분야가 90년대 태동하면서 당시 강남에서는 심미 크라운 수가가 100만원이 되는 에스테틱 시장이 만들어졌어요. 2000년대 중반 기술적 평준화가 이루어지면서 기공료에도 변화가 왔어요.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받던 수가대로 청구하다보니 가성비를 앞세운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변화하는 국내 상황에 맞게 유연성을 갖고 대처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기공소 운영보다는 YB 아트센터 연구소에서 원점으로 돌아와서 일을 좀 더 잘해보자 그리고 후배양성을 해보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병합해서 후배 양성하는 것을 보람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자로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도 많죠.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 세미나를 하면 한두 명쯤은 눈에 띄는 인재들이 있어요. 이 친구들이 잘 성장해서 기공소를 잘 운영해나가는 것을 볼 때 보람을 느끼죠. 제가 가르친 컨셉대로 잘 해나가는 것을 볼 때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곤 합니다.
 
후배 치과기공사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직업적으로 손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이죠. 기초를 무시한 상태에서 운용과 활용만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디지털이 발달할수록 과거 아날로그도 충분히 익혀야 합니다. 왁스업을 할 줄 모르는데 디자인 한다고 하면 마치 면허증도 없이 운전하는 것과 다를바 없죠. 과거처럼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왁스업으로 했을 때 어떻게 된다’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히 마우스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치아형태학을 충분히 숙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해요. 디지털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라이브러리를 보면서 형태를 식별하고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막연히 아는 것과 확실하게 조각해서 표현할 줄 아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죠. 앞으로는 재택근무가 많아질 수도 있어요. 기공도 스페셜리스트들이 있어서 집에서 디자인하고 기공소로 데이터를 보내 출력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죠. 
 ZERO를 통해 치과계에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저는 ‘만 시간의 법칙’을 믿습니다. 제가 실제로도 경험했기 때문이죠. 중간중간 디지털이 들어간 상태지만 기공 테크닉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아날로그를 절대 잊지 말고 과정도 중요하고 단계별로 어떤 것을 중요시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핸드피스나 조각도를 사용하던 손끝의 감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디지털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아날로그 실력을 갖고 치아형태학을 충분히 알고 배열, 형태를 알면 어렵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습니다만 우리가 천불부터 시작해 40년 만에 삼만불 시대에 살고 있지만 기공분야는 아직도 쉽지 않습니다. 업무 분야도 그렇고 밤을 새우고 주말에도 일하고 있어요. 기공료 현실화가 됐으면 합니다. 파이가 정해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싸워봐야 제3자만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어요. 환자를 위해서 상호 신뢰를 토대로 치과기공사와 치과의사가 소통하는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치민 소장은 작년 초 합류한 YB 덴탈랩에서 임영빈 소장과 함께 38명의 식구들과 치과기공의 기본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서로를 30여 년의 세월을 함께 한 선후배이자 동료, 때로는 스승이기도 한 관계’로 지칭한 이들은 디지털 시대의 치과기공소 경영과 세라믹 빌드업 분야의 교육을 담당하며 치과기공계 발전을 위한 또 다른 도전을 펼쳐가고 있다. 

박치민 소장은 오는 3월부터 그 동안 코로나로 인해 중단됐던 세미나를 다시 시작한다. 지르코니아 시대의 빌드업, 코핑 제작법과 PFM과 파우더의 접착, 지르코니아에서의 제작법 등을 과학적인 베이스로 접근하는 실전 강좌다. 50여 년 이상된 입증된 파우더가 지르코니아 시대에 어떤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제작법으로 구현되는지에 대한 기본 접근법을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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