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r Interview] 강사 활동 위해서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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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er Interview] 강사 활동 위해서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 윤준식 기자
  • 승인 2020.10.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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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보다 편안한 보철물 만드는 기공사 되고파

 

부산 위드치과의 최문식 기공실장은 국내의 많은 기공사들이 사용하는 노리타케 파우더의 인스트럭터이다. 일본 유학 시절 인터널 라이브 스테인 테크닉에 매료돼 아오시마 선생님을 닮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교합관계에 대한 조예도 깊다. <ZERO>는 정적이 흐르는 기공실의 스탠드 불빛 아래, 오롯이 하나의 보철물에 집중하고 있던 최문식 실장을 만났다.

윤준식 기자 zero@dentalzero.com

치과기공사를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됐는지, 입학 당시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치과기공사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분이 기공사셔서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또 운이 좋게도 같은 반 친구의 친척분이 기공소장님이셔서 친구에게 부탁해 기공소 견학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치과기공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 관련된 직종을 선택하고 싶었어요. 또 그 당시는 IMF 직후였던 시대라 취업률이 높은 보건계열 학과가 떠오르던 시기였습니다. 치과기공사는 개인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돼 입시 자료집을 구매해 확인하며 목표를 설정해나갔고 그 결과 대전보건대학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직업을 선택하면 바꾸기 쉽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름 신중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실장님의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자연치 모형을 제작해 연습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전보건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신입생 때는 대학생 본연의 자유를 만끽하느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같은 반에 만학도였던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이 형님의 친척분이 치과기공사로 계시다가 치과의사가 되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 형님은 친척분이 기공사 시절에 근무하셨던 치과기공실에서 낮에는 학교 강의를 듣고 밤에는 실습을 하고 계셨죠.
저도 이 형님 덕분에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그 기공실로 실습을 나가게 되면서 기공에 대해 조금 더 빨리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군 제대 후 2학년에 복학하면서 실습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당시에 동기인 임영빈 소장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 버려진 편측 트레이를 모아 석고를 붓고 모델을 만들어 그 모델의 자연치 형태를 따라하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이론 공부보다는 실습을 즐겨했었죠. 그리고 자취방에 항상 왁스업이나 카빙을 할 수 있게끔 나름대로의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마치 기공소 책상처럼요. 이때의 연습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실장님의 기공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 유학 시절이실까요?
일본에서의 경험도 큰 전환점이었습니다만 제게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은 대학교 1학년 치아 형태학 실습 시간입니다. 가끔 일본에 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할 때가 있는데 결국 돌고 돌아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학년 재학 당시에는 형태학 실습을 조창현 교수님께서 지도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 과제를 대강대강해 혼이 많이 났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상악 중절치 왁스카빙 과제물이 있었는데 그
날 밤에 잠이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새벽까지 카빙을 열심히 해봤었어요. 라디오를 들으며 하다 보니 재밌더군요(웃음). 다음날, 그 과제물을 제출했는데 항상 혼나기만 해서 그런지 교수님께서 과제물에 기재된 제 학번을 부르셨을 때 ‘아, 오늘도 혼나겠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혼내시기는커녕 칭찬을 해주시지 뭡니까. 그러더니 학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카빙은 이렇게 하는 거다’라고 하시면서 제 과제물을 모두 관찰할 수 있게 해주셨죠.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날이 제 기공 인생에 있어 임팩트가 가장 컸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제게 물어보는 친구들이 많아져서 실습 과제를 대충할 수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실습에 더욱 빠지게 됐고 ‘이것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복학 후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경청하게 됐고 열심히 공부하게 됐습니다.
조창현 교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치아형태학 실습 시간이 제 기공일 뿐 아니라 삶의 터닝포인트 입니다.

 

실장님을 떠올리면 단연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이력이 생각납니다. 그 히스토리를 소개 부탁드립니다.
평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 박치민 소장님처럼 일본에 다녀오신 분들이 유명하셨어요. 그래서 일본에 가서 포세린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어학연수부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식으로 기공일을 하며 오사카 세라믹 트레이닝 센터를 졸업했습니다. 이후에 로컬에서 좀 더 깊이 배우고 싶어 일본 치과기공사 면허증도 취득했고 정식으로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면허증을 취득하고 파인 치과기공소에서 근무를 하게 됐는데, 그곳은 기공수가가 굉장히 높았고 그만큼 매우 정밀하게 작업하는 기공소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의 진료수가와 맞먹을 정도로 높았던걸로 기억하는데, 모든 케이스의 보철물이 높은 퀄리티를 꾸준히 내는 강점이 있던 기공소였죠.
파인 기공소에서 기공작업에 대한 기본을 제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모델작업부터 마무리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제대로 작업해야 한다는 것과 직업에 대한 마음가짐 등을 정말 많이 배웠어요. 또 잘하고 싶은 욕심에 유명한 대가 분들이 어떻게 하시는지 관찰했는데 놀랄 정도로 기본을 철저히 지키시더군요. 결국 기공일을 잘하려면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일정하게 내고 문제없이 세팅하려면 모든 작업에 있어 기본이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죠. 또 치과의사 선생님, 위생사 선생님들과 소통하는 방식도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

 

본업을 유지하며 강사활동과 임상 논문 작성을 이어나가기가 체력적으로 부담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활동하실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과거에 장미란 선수가 이런 얘기를 했었죠. ‘365일 중 5일만 행복하다’라고요. 물론 제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내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도 그렇고 논문 등을 준비하는 과정도 그 단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그 과정까지 즐기지 못하면 이 일을 오래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신구덴탈과 함께 세미나를 활발히 하고 계신데, 신구덴탈과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와 실장님만의 세미나 컨셉 등을 듣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근무할 당시에 노리타케 제품을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아오시마 선생님이나 하야시 선생님, 유아사 선생님 같이 잘하는 분의 케이스를 보면서 노리타케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인터널 라이브 스테인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가면 노리타케의 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연치 않게, 신구덴탈에서 개최했던 ‘제1회 노리타케 콘테스트’에 참여해 대상을 받게 됐고 강사 제의를 받아 2012년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세미나에서 이론과 원리를 중시하는 편입니다. 수강 당일에만 끝나는, 집에 돌아가면 잊게 되는 세미나가 아니라 이론을 배워 색을 바라보고 분석하며 그에 맞는 파우더, 블록 등 재료를 선택해 자연치가 갖고 있는 특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익혀 이를 통해 다양한 케이스에 스스로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론적인 배경을 꼭 설명해드리고 있어요.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머릿속의 지식이 손끝으로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가분들과 많이 대화를 나눠봤는데 손재주 뿐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 경험의 깊이가 정말 상당하다고 느꼈어요. 이론적인 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오늘은 잘 됐을지 몰라도 내일은 절대 잘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로 활동하기까지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또 강사로서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여러 순간이 있지만 20대 시절에 요코하마에서 열린 QDT 심포지움 덴탈 쇼를 보러갔는데 너무나 큰 규모에 매료됐고 대단한 분들이 강의를 하셔서 이 강단에 꼭 서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18년, 드디어 그 자리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인생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에 꿈을 이뤘다는 생각으로 너무나 뿌듯하고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작년에 강의했던 노리타케 페스티벌도 세계의 유명하신 분들과 한자리에서 강연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저는 꿈을 이뤘던 2018년 그 순간이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강단에 오르는 것을 꿈꾸는 학생이나 후배 기공사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은?
어떤 일이든지 모든 것이 갑자기 이뤄질 수는 절대로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강단에 서서 짧은 시간동안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청중들에게 강의할 때는 수많은 질문을 받을 수 있어요. 내가 많은 케이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야 그 모든 것을 답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을 게 아니라 저도 학생 때 막연히 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실제로 강단에 오르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갑자기 이뤄질 수는 없어요.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실패했던 경험치 하나하나가 연자가 됐을 때 그 힘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스타처럼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뛰어나신 많은 분들이 매일 임상을 열심히 다루고 세미나를 듣고 책을 보며 차근차근 준비하셨다가 어느 날 좋은 기회를 맞아 빛을 발하지 않나 싶습니다.
급하게 마음먹지 말되 목표는 분명해야합니다. 그 목표에 따르는 노력은 물론, 스스로 재료 테스트도 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강사로서 오래 활동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책으로 공부한 지식을 몸으로 직접 겪어보고 임상에 적용해보며 응용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책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섭렵해 적용해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사로 오래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향후 세미나 계획과 개인적인 계획을 소개해주신다면
세미나도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공사 선생님들이 원하는 부분을 조사해서 수요가 많은 부분의 세미나를 꾸려보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돼 한 발 앞서 경험해보고 이를 토대로 열심히 하시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부정교합을 이해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지 2년 정도 됐습니다.
그동안 이것을 목표로 달려왔는데, 막상 이루고 나니 공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방향성을 잠깐 잃은 것 같아요. 다시 무언가 목표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화려한 보철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원장님과 환자분이 만족하며 구강 내에서 편안하게 오래 사용될 수 있는, 임상을 잘하는, 주변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공사가 되고 싶습니다.

우중혁 원장, 이상훈 기공사, 최문식 실장, 허영주 원장 (좌부터)
우중혁 원장, 이상훈 기공사, 최문식 실장, 허영주 원장 (좌부터)

 

마지막으로 독자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코로나19로 모두 힘들어지셨고 세미나 강의를 하는 분들도 어려우신데, 개인적으로는 가족도 돌아보고 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고난을 다들 겪고 계시겠지만 이 어려움도 극복하게 되면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힘드시겠지만 모든 분들이 즐겁고 건강하게 기공일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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