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故 한동만 선생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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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故 한동만 선생을 기억하며
  • 남관우 비고치과기공소장
  • 승인 2018.01.22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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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한동만 선생
故 한동만 선생은 기공사로서 업적을 남겼다. 덴탈테크니션으로서의 능력 외에 후배에 대한 애정과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마인드와 자세 등은 후배 기공사들이 귀감을 삼을만하다.
2017년 12월 한동만 선생의 1주기를 맞아 고인을 멘트로 모셨던 사람중 한명인 남관우 비고치과기공소장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주>

누구든 변화의 시점에서 태어나 생활한다. 즉 언제나 세상은 변하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사회에 기여할 기회는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업계도 마찬가지다. 업계 1세대 선배들은 불모지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한동만 선생은 그중 정치적이지 않았고 기술자 본연의 자세 또한 잃지 않으셨던 분이다.
오직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업계의 발전에 기여하셨던 분이 한동만 선생이다.
그 분의 진취적이고 학문적이며 다양한 능력으로 주위에 동화하시는 모습은 늘 신기하게 보여졌다. 전기, 기계, 화학, 문리, 인문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관심과 능력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일명 ‘한 박사’라는 칭호가 부족하거나 전혀 어색하지 않은 참다운 능력의 소유자셨다고 생각한다.  특히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시는 모습은 감히 흉내내려는 생각조차 들지못할 정도였고, 항상 무엇인가 골똘하게 만드셨다.
한동만 선생은 사진에 관심이 많으셔서 카메라를 늘 소지하시며 사물을 관찰하셨다.
후배들을 만날 때면 늘 팔 벌려 맞아주셨던 따뜻하며 구수한 분위기를 갖고 계신 독특한 분이셨다.  나도 이제는 그 분을 멘토로 모시는 여러 사람들중 하나가 됐다.
난 그분이 지금도 많이 그립다. 늘 아껴주셨고 비판해주셨기에 만남은 기다려지고 소중했다.
한번은 비스코의 서병인 박사님과 조그만 라이브바에 갔 는데 ‘세샘트리오’가 노래 도중 알아보고 서로 손을 흔들더니 노래가 끝난후 테이블에 합석했다.
대화중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꺼내시더니 즉석에서 연주를 시키셨다. 노래는 매우 신나는 왈츠풍이었고, 그곡을 달라고 간청하는 지인에게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 선생의 많은 능력중 업계를 위한 가장 큰 업적은 역시 포세린 라미네이트와 레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분은 심미를 위한 변화의 주도자셨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교정 기술이 부족했을 때 교정후 마무리의 아쉬움이 있을 당시 최초의 라미네이트 도입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모든 보철물이 씌우는 방식에서 붙이는 본딩방식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드신 것이다.
물리적 화학적 접착제와 오일이 없는 컴프레셔, 라이트큐링 기와 방식 등을 한꺼번에 불러들이는 획기적 계기를 만드셨다.
그 역동성은 멈추지않고 컴퍼짓 레진을 이용한 보철시스템인 테세라를 개발하셨고, 이것은 비스코 회사를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그 교육을 직접 지휘하셨다.  테세라는 그분을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인물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선생은 작고하시기 약 한 달전까지도 외국으로 강연을 갔을 정도로 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제대로 신경쓰지 않으셨다.
벌써 그 분이 이 세상이 부족해 더 멋지고 신나는 일을 하시기 위해 떠나셨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신지 한해가 됐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100세 시대에 너무 일찍 가신 것 같아 한편으로 가슴이 아린다. 그 분과 함께 했던 소중한 기억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을 보내기 싫어 늘 내 강의 PPT에 그 분을 붙잡아 놓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드리고 싶다. 

한 선생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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